들어가면서
군생활을 할 때 나는 내 업무만큼이나 타인의 업무에 주목했다. 내 공보정훈업무라는 것이 원래 그렇기도 하고, 또 가지고 있던 군 생활 목표 중 하나가 "내가 복무하는 기간에 나온 진중문고 모두 다 읽기"이다 보니까,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덕분에 여러 기회를 포착하는 안목을 가졌고 이 글에서는 그런 안목으로 겪은 자랑스러운 일을 소개하려 한다.
탄약지원사령부를 빛낸 인물이 되다
사령부를 빛낸 인물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누군가는 한평생을 한 사령부 예하에서 충성해도 이 빛낸 인물이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그런데, 영광스럽게도 나는 단기장교임에도 탄약사를 빛낸 인물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잘해서 이 영광을 누린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좋은 상관, 동료 그리고 부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영광스러운 명예를 가질 수 있게 도와준 부대원들 그리고 나를 추천해주신 우리 부대장님을 비롯한 모든 동료분들에게 감사한다. 이런 명예는 아마 군생활하면서 밖에 못 경험하기에 더더욱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나는 이 사례를 통해 사람에게 주어지는 명예와 칭찬이 사람을 얼마나 능동적으로 바꾸는지 경험했다. 이 표창 덕분에(?) 나는 남은 군생활도 정말 능동적으로 해냈기 때문이다.
사람을 대하면서, 특히 인력관리를 하면서 당근과 채찍이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이유로 탄약사를 빛낸 인물로 선정되게 되었을까?
기회는 작은 것에서부터 오는 법
2021년 초반, 육군본부에서 청년드림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원래라면, 나 같은 단기장교들(군에 오래 몸 담을 것이 아닌 인원)들은 크게 관심이 없는 행사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점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공보장교로 오랫동안 공부할 소수의 공보장교들을 제외하고는 아마 이 행사에 관심이 없을 것을 확신했기 떄문이다.
육군본부에서 개최하는 행사이니만큼 전국에서 능력좋은 공보장교들은 모두 참여하겠지만, 나에게는 우리 부대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경험과 자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확신을 보고서로 변환하는데 2일이 걸렸고, 보고서가 준비된 후 나는 부대장에게 이 행사에 우리 부대 대표로서 참여하겠다고 보고했다.
상급자의 승인과 지원 하에 10일, 정말 열심히 시놉시스를 짜고 인터뷰를 찍고 편집했다. 그렇게 잘 완성한 자료는 군단 실무자에게 전달되었고, 나는 우리의 영상이 군단의 대표작품으로 육군본부로 넘어가게 하기 위해서 사방팔방 연락을 했다. 그렇게 내 마음이 하늘에 닿은걸까 우리 영상은 우리 군단의 대표작품으로 제출되었고, 덕분에 일반제출보다 조금 더 유리한 상황에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 부대의 영상은 육군본부에서 선발한 최종 8개 팀에 선정되었고 덕분에 육군본부에서 시행하는 결선 페스티벌에 참석할 수 있는 티켓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페스티벌은 코로나로 인하여 취소되었고, 결국 암실평가를 통해서 결과를 통보받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부대가 받게 된 상은 장려상이었지만, 일단 부대를 빛낸 일이었기에 큰 격려와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내 상관의 1차, 2차상급자인 탄약, 군수사령관님이 좋아하셨다는 점에서 내가 제일 행복했다. 영상을 찍을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사회생활을 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상급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상급자의 상급자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나는 어느정도 인정을 받는 장교가 되었다. 그 덕분에 그 이후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웬만한 계획들은 반려되지 않았고, 상급자의 믿음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긍정적인 환경은 내게 자신감을 주었고, 이 자신감들을 통해 내가 행한 다양한 사업들은 나를 탄약사를 빛낸 인물로 이끌었다.
프로그래밍으로 표창을 받다
나는 대학에서 철학과 인문소프트웨어를 전공했다. 덕분에 42서울 1기 1차에 합격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여러 경험들을 거쳐 앞으로도 프로그래밍을 통해서 내 커리어를 쌓아가야겠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군에 있으니 프로그래밍 실력을 뽐낼 기회는 제한적이었고, 가능하다 할지라도 최종에 가서 내 장교라는 신분이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 내 신분에 알맞은 군 내 소프트웨어 경진대회가 있었지만, 내 병과 특성상 부대에서 안보내주는 경우가 많았고, 허락을 받는다 할지라도 내 주요업무와 겹쳐 3년간 한번도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내 커리어를 놓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나는 어떤 계기가 있어서 하는 프로그래밍이 아니라 내 일상의 문제를 프로그래밍으로 해결을 위해 코딩하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첫번째 타겟은 군 내에 있는 보안일일결산이었다. 사실 군의 보안일일결산은 크게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1. 퇴근 전에, 정해진 사이트에 방문해서(보안일일결산용 사이트)
2. 오늘 하루 본인이 정해진 보안규칙들을 자신이 지켰는지 체크하고
3. 그 결과를 제출하면 된다.
문제는! 이것이 매우 매우 귀찮은 작업이고 해당 사이트로 들어가는 링크는 찾기 힘들었으며 사람들에게 납득할만큼의 효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니 적극적이지 못했고, 그런 결과 많은 사람들은 이 일일결산을 놓치지 일쑤였다.
하지만, 이 필요없어 보이는 보안일일결산은 돈 관련되어서는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 보안일일결산 실시율은 곧 성과상여금과 부대 평가와 직결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보안관련되어서는 군에서 심각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보안 관련 성과지표로서의 실시율은 간부들, 특히 지휘관들에게 민감한 상황이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내가 편하려고) 보안일일결산 자동 알림 프로그램 제작을 계획했고, 이를 위해서 어떤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국방부 빅데이터 사업부에서 제공해주는 파이썬(아나콘다) 툴이었고, 두번째로는 내가 좋아하는 쉘 프로그래밍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후자를 선택했는데, 파이썬을 이용하게 되면 파이썬이 설치되지않은 컴퓨터에서 사용하기가 여의치않았는 반면 쉘은 어느 컴퓨터에서나 범용적으로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복잡한 쉘 규칙을 다시 익히면서 2일간 쉘 프로그래밍에 매달렸고, 나는 간단한 HTML, CSS와 쉘 프로그램을 연동한 나만의 보안일일결산 알림이를 제작하게 되었다. 완성하고 나서 나만 쓰기 아까운 이 프로그램을 나는 우리부대 보안담당관에게 알려주었고, 이 프로그램의 성능에 깜짝놀랜 보안담당관은 상급부대와 우리 부대 담당 보안부대에 이 프로그램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이 자랑의 위력은 매우 강력했는데, 프로그램을 보낸지 2시간 후 나는 상급부대 보안담당관으로부터 사령관님께 보고하고 전 사령부 예하부대에서 쓰면 안되겠냐는 전화가 왔다. 내가 괜찮다고 이야기하자마자 당일 상급부대 보안담당관은 저녁시간 막간의 틈을 타서 사령관에게 프로그램에 관하여 구두보고를 했고, 다음날 공식보고를 통해 내 프로그램은 우리 사령부 예하 전 부대가 모두 필수적으로 설치해야되는 공식 프로그램이 되었다.
프로그램의 성능은 매우 준수했다.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인 보안일일결산 누락율은 기존에는 30%대에 육박했었지만, 프로그램이 설치된 이후 2%대까지 떨어졌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는 해결했기 때문에 스스로 성공적인 프로그램이었다고 자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많은 인원들이 사용하는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이 성공이 내게는 더 크게 와닿았다.
앞선 성공과 함께, 나는 부대에서 완전히 인정받는 장교가 될 수 있었고 이를통해 나는 남은 군생활을 자신감있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는데, 바로 '내 상급자의 상급자를 행복하게하자'라는 깨달음이었다. 앞선 표창을 통해서도 많이 느꼈지만, 이번에도 2차 상급자의 업무고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니까 내 1차 상급자가 덩달아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정말 이게 인정받는 가장 빠른 방법이구나 확신했다.
또, 이 프로그램을 설치하게 하기위해서 했던 노력과 관련해서도 깨달은 바가 있는데, 바로 실무자 선에서 할 수 있는 노력보다 결정권자의 결정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처음 퍼지기 시작했을 때 몇몇 동료들은 내 프로그램을 깔기 싫어했다. 공무원집단이라서 그런 것도 있고, 또 연세가 있으셔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심리적 장벽을 넘기 위해서 나는 온갖 메뉴얼도 쉽게 만들고 설명회도 열고했지만 결론은 결정권자의 말 한마디가 내 모든 노력보다 더 강했다. 내 노력에도 꼼짝않던 몇몇분들이 결정권자의 한 마디 이후 매우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통해, 상급자와 결정권자를 잘 이용하자는 결론이 내 머리 속에 생겼다. 그 분들은 그럴 권한있고 그런 결정을 내려주기 위해서 나보다 더 높은 사회적 신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앞으로는 더욱 더 잘 이용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군생활 하면서 프로그래밍이 얼마나 좋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 깨달았다. 컴퓨팅 파워가 허락하는 한 무한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의 문제해결방식이 얼마나 기존 방식보다 더 우위에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 경험은 프로그래밍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볼만한 계기를 주었고, 앞으로의 커리어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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